[블러디메리캐슬] 잘 자요, 좋은 아침!
빳빳한 시험지를 앞자리에 제출하면서 중간고사가 끝났다. 괜찮게 본 것 같다. 기준을 명확하게 내리거나 맞추는 일에는 영 실력이 좋지 않아서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답을 빼곡하게 적었으니 나쁘진 않을 것이다.
전공서며 필기구며 무게감 있는 에코백을 오른쪽 어깨에 얹고 식당으로 걸어가는 참이었다. 한 학번 선배인 패트리지와 매튜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베스, 전단탄성계수 최대 허용 토크 구하는 거 풀었어?”
“운 좋게도 못푼 문제는 없었어요.”
“그걸 운이라고 할 수 있는게 부럽다. 여유인가?”
패트리지는 한 번 말문을 터면 할 말이 쏟아져 나와서 화제를 돌릴 수 있는 변화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마침 식당 앞이라 가능했고. 나는 답을 들으면 끝낼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 학식 뭐 나오는지 아세요?”
“어… 우삼겹숙주볶음밥이랑, 닭곰탕이랑, 돈육김치덮밥이랑.”
“선배는 뭐 드시게요?”
“우리 둘 다 그냥 짜치계 먹으려고.”
“아. 저는 오늘 쌀이 끌리더라구요. 맛있게 드세요!”
짧게 목례하며 등을 지니 자연스레 놓아줬다. 휴우. 짧게 안도의 한숨 내뱉곤 식권을 끊어 배급대기줄에 섰다. 지금 내 앞에 일곱명 정도 있으니까 이 정도 줄이면 대략 십분 뒤에 받을 수 있겠거니. 자켓 주머니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한쪽 귀에 꽂았다.
- 네, 요즘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다 보니 기관지 건강이 염려되고 있는데요. 기관지에 좋은 제철 식재료를 한번 모아봤습니다! 이제 곧 트릭 오어 트릿! 할로윈이잖아요. 할로윈하면 또 호박이지요. 네에. 주로 늦가을에 수확하는 늙은호박에는 강력한 항산화물질인 카로티노이드가 풍부한데요, 항암예방과 눈건강에도 좋아 10대 슈퍼푸드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뜨끈뜨끈한 호박죽과 어디든 잘 붙으라는 의미로 호박엿을 만들어 수험생이나 취준생들에게 선물해주는 것은 어떨까요? 건강과 의미를 함께 챙기는 일석이조 식품!
어느정도 줄이 줄어들고 식판을 들 차례가 들어섰다. 귀에 꽂아놓은 이어폰을 다시 빼고 자켓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어이쿠. 달그락 소리와 함께 이어폰이 바닥에 굴렀다. 혹여나 줄이 밀릴까봐 식판을 한쪽 팔에 껴곤 재빨리 쭈그려 앉아 이어폰을 주웠다. 아니, 분명히 그러려고 했다.
빠가각.
“헉.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떨어뜨렸는 걸요.”
“야! 너는 밟아도 무슨 남의 에어팟을 밟냐?”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오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뒷사람이 그만 이어폰 한짝을 밟아버렸다. 밟고 남겨진 잔해는 손바닥에 주워담아 에코백에 넣고, 어느덧 반찬을 담을 차례가 되어 식판에 수저를 올리고 하나씩 식판 위를 꾸렸다.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볶음밥을 받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어떡하지라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하긴요, 제 불찰인데. 괜히 부담을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했다. 밥 먹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왼쪽으로만 듣는 수밖에.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두고 다리가 하나로 긴 의자에 앉아 남은 한쪽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왼쪽 귀에 꽂았다. 호박에 이어 김장철 배투값에 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삼촌─실제 삼촌은 아니고 운전을 도맡아 해주시는 분이지만─이 태우러 오실 시간까지 약 삼십분 정도 남았나? 적어도 허겁지겁 먹지는 않겠다.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라디오를 들었다. 얼갈이배추도 작황이 좋아 배추 가격이 하락세에 저렴하게 배추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봤자 김장을 해본 적이 없어 평소 시세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엘레베이터 아래 버튼을 눌러서 기다린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주친 건, 온갖 빛을 흡수한 듯한 백발에 선명한 붉은 눈을 가진 가비타느와 그러니까… 장미색의 머리칼을 가진 스노우였다.
“벨!”
“가비! 학식먹으려구?”
“응! 스노우가 굶은 상태로 시험 볼 것 같아서 데리고 같이 왔어.”
스노우는 나를 쳐다보며 짧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나도 따라 인사를 하곤 엘레베이터 앞에 잠깐 멈춰섰다.
“벨은 시험 다 끝났어?”
“응. 다행히도.”
“와, 축하해! 아, 그러면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맞아, 집에 가서 쪽잠이라도 자려구.”
스노우는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다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붙였다. 저 투명한 눈이 예전에는 불편했는데.
“밑에서 기다리고 계신 듯 합니다.”
“아……. 참, 그러고보니 이제 점심 먹어야 하지요?”
“고생 많았어, 벨!! 조심히 들어가.”
“응! 가비도 식사 맛있게 해. 스노우도요. 시험 파이팅!”
가비는 내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힐때까지 손을 높이 들어 작별인사를 해주었고 스노우 역시 목례로 마무리했다. 몇 년이 지나도 여전하다고 느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제법 스노우와는 가까워졌다. 어쩌면 나의 존재를 체념한 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 베아트리스라는 사람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도 늘 만나게 되는 사람이니까.
순식간에 내려간 엘레베이터에서 발을 내빼고 건물에서 나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페리도트 승용차 뒷좌석에 앉았다. 색은 어두운데 여전히 눈에 띄는구나 싶었다.
고생했다는 인사와 함께 가벼운 몇마디를 나누다가 졸음이 밀려와 아예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까지 머리속에 맴돌던 건…….
‘테르시아가 내 후회 같아요.’
“여기서 나갈생각 집어 치우고 당장 편입시험에만 몰두해.”
“할아버님.”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베아트리스, 네가!”
그 사이에 약혼을 파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당장이라도 호적에서 파버릴 기세로 호통을 쳤다. 그것도 정확히 세 어절로 끊어서.
“실컷 외도할 환경을 마련해 주려고 네 진학을 존중해준 줄 알아? 멍청한 년.”
“언제 뒷조사를 하신 거예요?”
“네 행동거지가 조심하지 못한 죄지. 미래도 없는 예술가를 만나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동화를 꿈꾸었나본데, 네게 있어서 호기심 그 뿐이다. 평생을 올바르게 살아왔으니 그런 한심한 놈은 처음이다 싶어 그 녀석한테 끌린 거란 말이야! 호기심이 얼마나 갈 줄 알고 5년을 한 순간에 내팽겨쳐? 네가?”
“저나 션이나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5년이나 서로에게 감정이 없었던 건…….”
“내가 언제 사랑을 하라고 했지, 베아트리스?”
“알아요, 사랑이 아니라 명예와 재산을 지키라는 거였죠.”
“그런데, 왜!!!!”
여기까지만 보면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봐도 그럴싸하다. 다르다면 시대와 이름이겠거니.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알고있다. 며칠전부터 계속해서 곱씹어서 해결법을 고민했으니까. 줄리엣은 자신을 희생했지만 나는 그럴 그릇은 아니었는지, 로미오역을 팔아버리는 선택지만 남았다.
“그 사람, 돈 많아요.”
그리고 이 발언은 이후 헬레니아 집안에서 아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베아트리스 헬레니아를 놀리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말이다.
다만 할아버님은 이런 말로 수긍할 사람은 아닌 지라. 차례차례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수석으로 졸업할 것, 졸업 후엔 바로 취업할 것.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로 없던 통금도 생겼다.
그 어느것 하나 쉬이 넘기는 법은 없었지만, 결국 내가 이겼다. 베이트리스 헬레니아는 테르시아 샤렌테와 교제한다.
샤샤에게는 당분간 교제하는 건 비밀로 하자고 부탁했다. 그게 내가 션에게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는 내게 축하한다며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떠났다. 이제는 우정으로도 남지 못한 남이다.
샤샤는 아직도 술자리에 있나. 도예과는 도대체 뭔 놈의 술자리가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 도예과의 중간고사 기간은 이미 끝난지 오래다. 이어서 들은 소식으로는 술자리가 일주일에 네번은 있다지.
술에 취한 적을 한번도 보지 못해서 걱정을 해본 적도 없지만, 지금 내가 통금을 버리고 외투도 없이 밖으로 나가는 건 단순히 보고싶다는 충동때문이었다.
[보고싶으니까 거기로 갈래요.]
[응 o̴̶̷̤ ̫ o̴̶̷̤]
저 난해한 이모티콘은 대체 뭐지?
“택시타고 왔어?”
“와, 네. 대리 부를까요, 샤샤?”
“오자마자?”
술자리에서 이렇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아닐텐데? 거절도 잘 하는 사람에게서 진한 알코올 향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발음도 멀쩡하고, 두발로 제대로 서있고, 눈도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 왠지 치사하다.
“얼굴만 보면 됐어요.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샤샤의 고개가 내 이마와 가까워 질 때 즈음, 손바닥을 내밀어 얼굴을 막곤 대리기사님을 콜했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샤샤는 두 손을 들며 생글생글 웃고 기다렸다.
“삼분만 기다리면 오신대요.”
“삼분.”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있어.”
“그래서 술 마신 거예요?”
“아닐 걸.”
샤샤의 볼 위에 손을 얹었다. 열이라도 있나 확인하려던 것 뿐이었는데, 미지근한 뺨을 어루만지니 그냥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지고 싶긴 했다만.
“샤샤, 저 통금시간 지났어요.”
“응.”
“데려다줄게요.”
얼마나 큰 일이었으면 이 사람이 이렇게 녹아내릴 수 있을까, 궁금했다. 가는 도중에 샤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대충 그런 변명들로 긴장감을 억누르고 내뱉었다. 같이 가자고.
대리비가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대리기사님은 돌아갈 때 택시타고 가시나, 그런 궁금증과 함께 샤샤의 현관 앞에 섰다. 참고로 나는 샤샤의 집에 와본 적이 없다. 주소도 몰랐고. 샤샤도 우리집 주소는 모를 걸.
“엘레베이터까지는 기다려줄게요.”
그러자 샤샤는 웃으며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래.”
물론, 처음에는 짚 앞까지라고 했다가. 현관까지라고 했다가, 엘레베이터까지라고 점점 길어졌지만. 샤샤도 하나도 안 취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니 연인으로서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며 합리화하기 일쑤였다.
“웃지마요.”
층수를 알려주는 음성과 함께 샤샤는 엘레베이터에서 내렸고, 나는 엘레베이터 열기버튼을 누르며 가만히 서있었다. 누군가 엘레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죄송할 따름이지만, 더 오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숙취해소제 있어요?”
“마셔본 적 없어.”
“그래요. 물이라도 많이 마시고 자요.”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안 보고?”
“놀리는 거죠.”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있다. 엘레베이터 열림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손가락 끝에 힘이 없어졌는지 다시 닫힐때 즈음, 샤샤가 손으로 엘레베이터 문을 막아섰다. 이거, 고장 안 나나?
“샤샤, 저 MT말고 외박해본 적 없어요. 한번도요.”
“응.”
“그.”
“응.”
“그런데 이미 통금도 지났으니까.”
“택시 부를까?”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봅시다! 들어가요, 들어가.”
열이 오르는 것은 술 한모금도 안 마신 이쪽이었다. 샤샤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소리내어 웃으며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어쩌다 이렇게 휘말리게 된거지?
사실 이쯤되면 나도 알고있다. 휘말리고 싶었던 거지?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응, 문자가 와서.”
“문자요?”
휴대폰을 들어 메세지함을 보여주지 않아도 금새 알아차렸다. 내가 문자를 보낸 거랑 음주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도감과 허탈함이 섞인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가볍게 쏘아보려고 했는데 지독하게도 전화가 왔다. 보나마나 어디인지부터 시작해서 당장 삼촌을 불러다 줄테니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라는 전화일 게 틀림없다. 샤샤는, 휴대폰을 들어올려 통화를 받으려는 내 손목을 잡곤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나, 군대가.”
네?
진동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울린다. 통화를 거절하고 곧바로 외박할테니 찾지 말라는 말을 최대한 유순하게 적어 문자를 보냈다. 그럼에도 두어번 전화가 더 오다가, 대신 아침에 일찍 들어오라는 답장을 받고 나서야 끝이났다.
“아니, 잠깐만요. 군대 다녀온 거 아니에요?”
“다녀왔지, 18개월.”
“그런데, 왜.”
“예비군 훈련이거든.”
“…아.”
놀아난 기분이다. 분명 저 사람은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왜 늘 속는 기분이 드는건지 모르겠다.
“택시 불러요.”
내가 택시를 부르지 않고 굳이 요청을 한 이유를 상대는 알고 있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수수께끼를 내던졌으니까 이젠 익숙해질 법 하다. 아닌가? 샤샤는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도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잡아, 붙잡아라, 붙잡아.
답은 정해져 있고 그걸 말하면 되는 시간. 붙잡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그럴리가. 그럴 수는 없다. 내 체온이 올랐다는 소식이 샤샤의 손바닥 안으로 다 새어나갔으니까.
“그래.”
그래그래마왕도 아니고 뭐가 그래인 건지 잠깐 고민을 해봤다. 내 속마음을 읽고 가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어두? 아니, 뭐가 그래야?
“가.”
헛웃음이 나올뻔한 걸 겨우 참았다. 가? 가라고? 우리 조금 긴 텀으로 자정을 넘길 생각은 없어요? 여전히 웃고있는 저 얼굴이 샘나서 후드티의 끈을 내쪽으로 잡아 당겼다.
“지……”
“나 배고파ㅇ, 네?”
분명 뒷말은 붙잡으려는 말로 끝났을 것이다. 평소에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을 느긋한 기회주의자가 할법한 말이라 치부하며 흘러 믿었는데, 이제와서야 가만히 있을 걸 후회하고 있다.
“파스타 좋아해?”
“……네.”
샤샤가 파스타를 만들어 주는 동안 나는 태연하게─전혀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 샤샤의 옷을 빌려입고,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도 하고, 누릴 수 있는 거라곤 실컷 누렸다. 실내에서 단둘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이제서야 느꼈다.
“그러고 보니, 샤샤는 매번 식사 후에 코코아를 마시는 것 같아요.”
“스노우가 타줬어.”
“정작 스노우는 코코아 안 마시지 않어요?”
“그런게 스노우 답지 않아?”
“스노우 답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응, 그럴만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코코아를 호호 불어마신다. 가비와는 어렸을 때의 기억만으로도 변함없이 사랑스럽다는 것도 알고, 무얼 좋아하는지. 무슨 노래를 듣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알 수 있지만… 스노우는 도통 어려운 사람이다. 스노우 다운거라.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떠올려봤다.
“코코아는 안 마시지만 코코아를 타준다, 발음이 굉장히 또박또박하다, 가비에게만 미소를 지어준다, 가비와 모든 교양이 겹친다, 나를 불편해한다?”
샤샤는 금새 다 마셨는지, 코코아를 마셨던 컵을 낮은 탁자에 내려놓고 물었다.
“테르시아는?”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수작부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표정과 질문이었다.
“속눈썹이… 예쁘다, 손가락이 예쁘다, 목소리가 예쁘다, 옷을 잘 입는다, 웃을때 고양이같다.”
“응.”
“여기까지! 잘 마셨습니다. 칫솔 남은 거 있어요?”
“갖다줄게.”
샤샤가 여분의 칫솔을 찾고 있는 사이에 머그잔 두개를 들어 헹구었다. 하마터면 그 눈동자에 속아 속내를 줄줄이 말할 뻔 했다. 내 안에 든 모든 패가 드러나면 분명 잠을 못잘테니까.
나는 돌멩이를 들고 바닥에 앉아 주변에 안전구역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구역 밖에서 내가 어떤 맛의 사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죄송하지만, 나는 줄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장난을 치곤 웃으며 혹은 진중하게 다가와 내게 또다시 궁금해하며 물어본다. 어떤 걸 숨기기에 두 손을 뒤로 감추고 있느냐고.
아니, 사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손이 창피해서 숨기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이들이 궁금하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꾹 빈손을 숨겨왔다. 내가 가진 빈손을 눈치채면 분명 실망할 걸? 그럼에도 샤샤는 단숨에, 어쩌면 한번에 내가 빈손이란 걸 알아차렸다.
빈손인 걸 뻔히 알면서도, 허물뿐인 걸 알면서도 내게 더 침범하려 드는 모습이 의아했다. 그 의아함은 내게 욕심과 바라는 것을 던져주었다. 샤샤는 어떤 사람이냐구요? 내 시야를 내 청각을 가려버린 사람이에요. 나의 첫사랑이지요.
덕분에 다른 누구를 만나도 얼굴만으론 설레지 않을 것 같기도?
“샤샤, 자요?”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건지, 내가 하는 말들에 점차 흐리게 대답해주다 먼저 잠들었다. 평소에 잠이 없나 싶을 정도로 자는 걸 도통 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신기할 뿐이었다. 자는 모습은 평소의 서늘한 눈빛과는 달리 포근해보였다.
“와…… 이런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니.”
발을 동동 굴리다 잠에서 깰까, 이내 멈추곤 옆에서 실컷 뺨을 어루만졌다. 말 한마디 없이 품에 닿는 온기만으로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않더라도 나는 샤샤의 숨 한결 한결이 사랑스럽고 모든 순간이 애틋하다고 느낀다. 서로 다른 속도의 시계 위에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의 사랑을 네가 느끼길, 네가 다 알길, 그래서 행복하기를.
“잘자요. 꿈에서 활짝 웃기를.”
세상이 무궁함을 자조하게 만들더라도 우리의 끝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눈을 감는다. 한 밤 바람결에 실어 보낸 나의 안부에 나도라는 말이나 전해주길 바라는 나는, 오늘 밤도 바람에 겨워 당신의 꿈으로, 꿈으로.
“……샤샤?”
“응, 좋은 꿈 꿨나보네.”
뒤늦게 몰아오는 피로에 무겁게 눈을 붙였을 때, 얼핏 ‘잘 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중간에 깬 것인지 환청인지는 비몽사몽했기에 알 수 없지만, 다만 확실한 건… 굉장히 따뜻한 꿈을 꿨다.
“여기, 터가 좋나 봐요.”
“오.”
“하하! 좋은 아침이에요, 샤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