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순.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은 엄한 추위가 스며들어 몸을 떨어댔고 제비들은 하늘을 날개로 덮으며 유연히 날아들었다. 백색의 산을 오르는 제 손끝은 깨질 듯 아려와 뜨거운 숨결로 후후 불며 녹여보지만 무색하게도 찬바람이 손과 뺨을 스쳐갔다. 섣달의 산은 추위가 살을 베어가는 듯했다. 들리는 거라곤 새하얀 눈이 밟히는 소리와 간간이 뛰어다니는 다람쥐 발소리가 전부였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했다. 내뱉겨 나오는 입김은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 나게 해주는 듯 보였다.
'처음 눈이 내릴 땐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는데. 눈보라라도 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될 줄이야, 나도 참 간사하구나.'
발은 붓고, 손은 시리고, 다리도 아프고. 물집 잡힌 발가락이 걸을 때마다 스치며 쑤셔온다. 귀하다는 약초만 캐면 마을로 내려와 실과 바늘로 물집을 빼내리라.
나는 약초를 캐다 건네주는 약초꾼이면서 보장사다. 본래 보장사란 머리있는 양반들이 나라의 동향을 짐작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야 연애 서신을 전달해주거나 크고 작은 소문을 내주곤 한다.
이번엔 대추나무를 심은 집에 사는 서 대감께 뒷산의 그 귀하다는 약초를 캐다 달여드리라는 아씨의 부탁이었다. 그 아씨께서는 십사년 전, 열 살에 가난한 양반집 아들과 혼인을 하였는데, 아씨의 아버지인 서 대감은 이를 탐탁지 않아 두 번 다시는 아씨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제 딸과 혼인을 할 사내가 가난한 것도 모자라 과거에 낙방을 여럿 할 사람으로 보여 안타까움에 고집피우신 것이랬던가. 아씨는 뵙지도 못하는 아버지께서 조금이라도 날을 오래 보내시길 바라, 그 귀하다는 약초를 달여 드리라고 내게 청한 것이다.
'대감님보다 제가 더 먼저 갈 것 같아요, 아씨….'
먹으면 삼백살은 족히 살 수 있다는 약초가 외령산(孤靈山)에 있다는 소문이 있다. 추위에도 위에는 붉은 꽃을 피우며 아래는 생긴 게 꼭 삼과 같다고 했다. 이 약초가 겨울에만 보인다 하여 약초꾼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가 약초를 지키는 외로운 도깨비가 사는 산이라 하여 외령산이라 지어졌다나.
그런 건 다 옛말이려니 생각하며 마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낮은 초가지붕이 맞대고 서 있는 풍경은 아담해 보였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옆에는 얼어붙은 연못이 보이고, 더 옆에는 붉은 꽃이 보이고… 붉은 꽃?
소복이 쌓인 눈 사이로 붉은 꽃이 피어있다. 재빨리 무릎을 꿇고 꽃을 꺾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는 삼이었다. 그래, 이럴 때 약초꾼들은 이런 말을 하지.
"심, 심봤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 장작에 쬔 불에 몸을 녹일 마음이 급급해 일어서려다 치마 끝자락을 밟고 몸이 기울어진다. 시선은 절로 하늘로 향해지고 눈이 시릴 걸 짐작해 눈살을 절로 찌푸렸으나, 어째서인지 밝은 햇살은커녕 어둑해지고 있었다.
살짝 뜬 눈으로 보인 건… 뭐랄까, 외로워보이는…….
털썩.
달리고, 달린다. 작은 한 몸을 편히 숨길 곳이 없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속으로 도망친다. 목에선 절로 피가 느껴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뒤를 돌아봐선 안 돼, 앞만 보고 달려.
내가 지금 눈을 감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 여기가 산은 맞는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생각들은 후에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찐 감자 몇 개를 비단 주머니에 넣어뒀어야 하는 건데. ……찐 감자? 이런 상황에 고작 떠오르는 게 찐 감자 일리가 없다. 찐 감자라니?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눈을 떴다. 절로 익숙한 찐 감자의 냄새가 났다.
"드디어 일어났네."
옅은 갈색 머리칼에 붉은 빛을 띠는 고동색 눈. 이방인인가? 그의 무릎에 놓여있는 소쿠리 안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감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찐 감자가.
나는 당장 여기가 어디인지 눈 앞의 남성이 누구인지보다, 서 영감께 달여 드리려는 약초를 찾았다. 분명 손에 쥔 채로 넘어졌을 터인데.
"제, 제 약초 못보셨어요?"
"네 약초? …아, 이걸 말하는 거구나."
"네, 감사합니다. 구해주신 것도 모자라 약초까지 챙겨주시다니,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응, 감사인사는 됐어…. 그런데 이거, 네 약초 아니야."
이게 무슨 소린가. 힘 센 자와 힘인 약한 내가 끝없는 줄다리기를 해서 가져가라는 건지.
"그럼 누구의 약초라는 건가요?"
"…당연히 내 약초야.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주도록 할게."
"아, 예에… 감사합니다."
곱게 생긴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감사말이 그렇게 좋나. 몸을 일으키려 자세를 바로 잡는 순간 바람결에 달콤한 향기가 떠다녔다. 작은 바람에도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꽃향기는 아찔한 어지러움을 동반했다. 보라색 꽃창포와 선홍색 꽃무릇이며 겹복사꽃에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했다.
"마음에 들어?"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봄도 여름도 아닌 겨울이렸다. 꽃들이 피어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흰 눈과 듬성듬성 보이는 녹색의 땅, 색색의 꽃들이 분명했다.
"……여기가 어디죠?"
"외령산."
"지금이 언제죠?"
"겨울 둘째달."
"제가 지금 살아있는 건 맞죠?"
"응, 숨은 쉬더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영문을 모른 채 허공에 시선을 둔다.
"…그쪽은 왜 외령산에 있는 거예요?"
"이상한 질문이네… 나는 여기에 살고 있으니까."
"여기에요?"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을 받아주지 않을만큼 인심이 퍽퍽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여기로 도망을 온 것이거나, 길을 잃어 스스로 발을 묶은 것이거나.
"너는 누구야?"
"…저는 심 연이에요, 인연 연자의 연."
무기력해보이던 적갈색 눈이 커지면서 빛이 스며든다. 내 이름이 그리 이상한 이름은 아닌데. 옆 집 똘똘이도 내 이름만 들으면 혀를 내밀며 꼬리를 흔드는데. 그쪽은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을 가졌다고. 이방인이니 찰수, 자임수… 뭐 그런 이름이려나.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령(靈),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러. 하지만 이름은 아니야."
"령? 도깨비 할 때의 그 령이요?"
사내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되려 부채질을 가볍게 하는 손이 한가롭기까지 했다.
"…도깨비보다는 허여멀건 게 꼭, 귀신같은데."
"응?"
"아,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가 외령산인가. 하기야, 늦은 밤중에 사람을 만난다면 그게 귀신이건 도깨비 건 착각할 법하다. 그런데 보통 사람에게 도깨비라는 별명을 지어주던가.
"연아."
"네?"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 쉽게 내뱉은 내 이름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내 이름을 듣고 놀란 것처럼 보였던 건, 동명이인이 있어서였던 걸지도 모른다.
"그 약초 줄테니까 나한테 이름 하나 줄래."
무병장수약을 달라, 불로초를 달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름을 달라는 사람은 처음이다. 처음보는 사람한테 무슨 이름을 받을 줄 알고.
"그럼 신으로 하지요. 우리는 오늘 처음 보았고, 저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처음이니. 그런 의미에서 신(新)을 드리겠습니다."
"신……."
지어진 이름을 곱씹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사람을 홀릴 듯 아름다워 마음이 애달파졌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뺏기지 말라 하였다.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으니 해가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려 치맛자락을 털었다. 치마도 털고, 제 손도 털어 손바닥이 보이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사내는 자신의 희멀건 손으로 내 한 손을 겹쳐 잡았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다. 아니, 잠깐. 남녀가 유별하거늘!
나는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사내의 손등을 휘갈겨 손을 떼냈다. 사내는 놀란 듯 자신의 손을 품에 가져가 나를 멀뚱 쳐다본다.
"그 약초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
사내의 눈이 저절로 자신의 옆에 놓인 붉은 꽃 약초에게로 향했다. 짧게 머리를 굴리려는 듯 약초와 눈싸움을 하다 내게 약초를 건넸다.
……가, 다시 도로 가져갔다. 지금 이름을 대충 지어줬다고 이러는 건가?
"이름을 불러주면 줄게."
"이름을 지어주면 준다더니, 불러주면 주신다뇨."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
입을 벙긋거리다 꾹 닫았다. 마음에 든다는 그 짧은 말이 머리에 새겨져 내게 긍정 어린 미소를 짓게 하기 충분했다. 가만 생각을 해보면 단번에 나온 이름이 제법 나쁘지 않는 듯하다. 마을로 돌아가면 작명가 자리라도 마련해볼까. 어깨에 힘주어 미소를 머금으며 사내의 청을 들어주었다.
"신아."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내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사내의 깊은 눈망울이 사라졌다가 또 나타났다.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마음마저도 그 순간, 빼앗긴 듯했다. 나는 보이는 것에 약하구나.
넋을 놓고 바라보다 어느새 손에는 약초가 쥐어져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넋 놓고 바라본 걸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급히 땅으로 거둬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한다는 게 감사한 존재가 될 줄이야.
"가는구나."
사내는 소쿠리에 담겨있는 감자들을 몇 개 꺼내곤 건네주었다. 나는 감자를 비단 주머니에 넣었다. 적어도 허기질 일은 없겠구나.
"어쩔 때 마을에 내려오세요, 마을 사람들 모두 넓은 사람들이거든요. 은혜도 갚겠습니다."
"같이 가길 바라…?"
"아니요."
"……."
잘은 모르겠으나 사내의 얼굴이 그을린 것 같았다. 나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기에 아무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나는 등을 돌려 마을 쪽으로 향했다.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가면 아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내가 남긴 발자국은 생각보다 큼지막해서 눈에 띄었다. 발자국 위에 내 발을 다시 포개어 올리고, 또 다시 올리고.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발자국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둑해진 곳으로 옮겨졌다.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뒤를 돌아보면 분명히 밝고, 다시 돌리면 어둡다.
소름이 끼쳐 사내가 있던 곳으로 재빨리 뜀박질을 했다. 괴이하다, 괴이해. 열일곱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이어야만 한다. 그래, 한겨울에 꽃이 피어있는 것부터 이상했는데. 왜 이제서야 다시 이상함을 느꼈을까.
"연이?"
"허억, 헉… 저기… 저기요."
가쁜 숨을 내쉬며 사내에게 성큼 다가갔다. 사내는 소쿠리에 손이 옮겨졌다 감자를 들곤 내게 들이밀었다.
"다 먹었구나."
"아니, 하나도 안 먹었거든요. 그게 아니라."
나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죠? 저긴 왜 어두운 거예요?"
"여긴 외령산이고 지금은 *초야니까."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첫째 부분으로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를 말한다.
"초야라고요?"
사내는 담담하게 대답을 하였고 되묻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하하, 연아. 표정이 웃겨."
사내는 숫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소리 내어 웃는 그를 괜히 쏘아보았다. 그야 영문모를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고 또박또박 물었다.
"초야인데 왜 밝은 거죠?"
"여긴 외령산이고 내가 있으니까."
"그래요. 여긴 외령산인데, 그쪽하고 외령산이 초야에 밝은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예요?"
"외령산은 외로운 도깨비가 사는 곳이고 나는 령이니까."
"도깨비라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사내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도깨비라 말하고 싶진 않다고 중얼거리는 듯 보였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 자가 도깨비라고 밝히더라도 나는 믿겨지진 않을 것이다. 아니, 되려 말이 된다. 그래, 나는 방금 도깨비에게 홀린 것이 될 테니까.
반은 아니기를, 반은 맞기를 하는 마음으로 사내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내는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나는… 외령산의 도깨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