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기억나? 집에서 봤던 석양 말이야."
헬레니아의 첫 번째 태양, 레하트의 공주, 브리트니 레하트 헬레니아. 사랑스러운 나의 언니는 가끔씩 해가 지는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서있으면, 그녀는 항상 쌉싸름한 미소를 지으며 '태양이 매일같이 찬란했으면 좋겠어.' …라는 말과 함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브리트니에게 '내일은 더 환하게 웃으며 다시 태어날 거야!'라는 소릴 했던가. 어쩌면 상처도 없고 슬펐던 적도 없어 그런 다정한 말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날의 나는 석양에 비춰 찬란하게 빛나던 눈물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도 눈물을 흘려보고 싶었다. 할아버님께선 '네겐 그런 건 필요 없어.'라며 눈물을 흘리는 법을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덧붙여 언니가 많은 것에 슬퍼하고, 많은 것에 웃으며, 많은 것으로 상처 받을 거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렇기에 브리트니가 사랑스러운 건데.
"그때 내가 흘린 눈물은… 벨을 위해 울었던 거야. 나는 헬레니아 사람들이 너를 화초처럼 키우려 했던 게 너무 속상했어. 태양이라면서 정작 태양을 못 보게 했잖아."
브리트니의 다정은 빛을 동경하는 나방마냥 홀린 듯이 이끌어 주위를 맴돌게 한다. 나의 다정이 습관이라면 그녀의 다정은 애정이었기에, 그 다정에 가까워지려고 하면 내가 검게 그슬리는 것만 같았다.
"헬레니아는 나를 딱 말라죽지 않을 정도의 물만 꼬박꼬박 주는 식으로 자라나게 해주었죠. 하지만 괜찮아요, 브리트니. 덕분에 어린 날엔 행복만 알았는 걸요."
"너는 늘 삼키는 것에 익숙한 것 같아서 내가 너무 아파, 벨.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이후부터는 더더욱 그래. 필사적으로 무언갈 억누르려고 하잖아. 나는 보여."
"……."
"울어야 할 것들에 울지 않아. 잠시 쉬었다 가도 되는 일인데도 계속 나아가려는 것에만 급급해.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존경할지도 모르지. 책임을 지라는 걸 네게 매번 말하긴 했지만, 이런 걸 바란 게 아냐. … 내 눈에 비치는 너는 너무 큰 고통으로 통각이 무뎌진 아이같아. 그러지 마, 벨. 그러지 말어."
석양을 바라보던 그날의 모습처럼, 조용한 파도가 그녀의 뺨을 타고 내려온다. 아마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운 물이 뺨을 적시고 있으리라. 나를 조금이라도 웃게 하기 위해 내 모든 감정을 대신해서 느껴주고 울어주는 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하, 언니의 눈물은 내겐 너무 과분해요. 지금은 태양이 보이지도 않는 걸."
"태양 때문에 운 게 아니라니까."
"……응, 고마워요."
나는 브리트니와 이름부터 내면까지 많은 것이 달랐다. 브리트니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감정을 희생할 줄 안다면, 나는 타인의 희생을 지켜볼 용기가 없어 몸이 나설 뿐이다. 가끔씩 브리트니를 흉내내고 싶었지만, 사람의 내면까지 닮기는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시도조차 못 했다.
브리트니의 뺨에 흐르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다, 브리트니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얹곤 조용히 입을 떼었다.
"…베아트리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나의 제안이야. …레하트로 오지 않을래?"
"브리트니."
"들어줘, 벨. 이곳에선 얼어붙은 잿더미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막으려 해. 헬레니아는 베스텔리에를 두고 떠날 준비를 하고있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면 레하트도 분명 사랑하는 나를 봐서라도 헬레니아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때가 되면 새로운 곳을 개척해나가자."
"……."
"무엇보다도 나는 당장 네가 왕성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그곳에 더는 발을 딛고 싶진 않다. 숨 막혀 오는 그 강박과 적막 속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유리 발판 위에서 나의 손짓 말 행돈 하나하나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이런 이유뿐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용기를 가져선 안 될지도 모른다.
"부탁이야, 헬레니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살아줘. 제발."
아, 상냥하게 잡아준 두 손에선 떨림이 느껴진다. 무엇이 이리도 두렵게 만들었을까. 태양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내게 태양은 브리트니인데. 나는 다시 브리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애써 지키고자 했던 언니의 웃음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나는 브리트니의 젖은 뺨이 안쓰러워 가만히 안아주었다.
"헬레니아 때문에 삶을 버리고 있지 않아요. 헬레니아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는 거예요. …브리트니, 나는 확실하게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약속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의 답은, …미안해요."
"……."
"레하트가 헬레니아에겐 낙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은 낙원이 아닙니다. 지금은 애셜에서 나를 왜 필요로 하는지 알고 싶어요. 게다가... 나는 다른 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요."
"……아아, 정말이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리고 나는 그런 너라서 더더욱 사랑해, 벨."
"응, 나 역시 브리트니를 많이 사랑해요."
머리카락을 한없이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언니의 손길과 묻어 나오는 달콤한 향기가 내 마음속 깊숙한 곳을 달래준다. 언제나 과분한 사랑이다. 이런 과분함이 적당해질 때까지 내 모든 걸 걸고 헬레니아를 지켜낼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요, 브리트니. 모든 영지민들을 잠깐이나마 레하트로 떠나게 해주셨으면 해요. 그들은 강하지만… 그들의 강함은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들에 비해선 턱없이 모자라요. 그들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의 안녕을 위해 그것들을 무찌르는 것밖에 없어요. 나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에겐 보호받을 수 있는 땅이 필요해요."
인간이 만들어낸 백야는 자연스러운 어둠에 굴복해 녹아든다. 백야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아. 소중한 것들이 바스라지지 않도록 모든 이의 안녕은 내가 만들 테니까. 안정된 백야를 가져올 때까지 그들에겐 짧더라도 마련되어 있는 백야로 그들을 보내야 한다.
"…알았어, 레하트와 헬레니아를 걸고서 맹세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레하트로 피난시킬게."
"…고마워요, 브리트니."
"단."
브리트니의 뜨거운 손으로 차가운 내 뺨을 녹인다. 이제는 브리트니가 떨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양을 쟁취하고 와."
태양은 가려져있지만 브리트니의 머리카락이 황금보다도 태양보다도 훨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보석처럼 붉게 일렁이는 눈동자엔 석양을 담은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줄곧 나의 태양은 브리트니였다. 태양을 거스를 수 없는 나는 활짝 웃으며 이에 답했다.
"모든 것은 공주님의 바람대로."
꽃과 나무가 시들 때 정원을 찾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흔적 없는 무수한 발자국을 지나 밤의 정원은 소리가 없고 낮의 기억에도 남게 되지 않겠지.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눈 밑의 어둠은 터오는 새벽으로 밝히면 되고, 찬 공기는 머리를 휘감아 그 속의 매듭을 풀어내면 된다. 살아 숨 쉬며 누렸던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것에게 바칠 것이다. 누군가가 밑바닥을 찍고 있다면, 기꺼이 나를 지르밟고 올라갈 수 있도록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지키는 방식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것이다. 해를 쟁취해 모두의 앞길을 비추는 아침을 끌고 올 것이다. 어느 하나라도 가난에 좌절하는 이가 없도록, 어느 하나라도 추위에 못 이겨 아파하는 이가 없도록, 더는 인외의 것으로부터 무고하게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없도록.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들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쳐 태양을 쟁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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